갈라디아서 2장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
<1-5절> 바울 예루살렘 방문 바울의 이방인 동역자인 디도가 억지로 할례 받도록 요구받지 않았음을 명시한다. 이 디도의 예는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도 할례에 관한 한 바울의 의견과 동의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디도가 할례 받도록 강요받지 않았음은, 이방인은 할례 받지 않아도 되었음을 사도들도 인정했음을, 신학적 논의의 역사적 기반을 준다.
<6-10절> 아마도 바울의 반대자들은 율법의 행위들을 이방인들에게도 부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 같다. 그들이 율법의 행위로부터의 자유를 엿보고 다시 종노릇하게 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바울은 그런 요구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고(5절)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도 바울의 입장에 동의했고, 더 나아가 바울의 이방인 전도 사역을 베드로의 유대인 사역과 대등하고 병행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 소 단락은 바울이 이방인에게 선포한 복음에 대해 예루살렘 지도자들도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었음을 역사적으로 입증한다.
<11-14절> 이 단락은 야고보로부터 온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문제에 대해 다룬다. 그들이 복음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유대교의 정결 규례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가 그들의 문제였고, 베드로마저도, 바나바까지도 그들의 눈치를 봐야 할 정도였다면, 그들의 영향력이 얼마나 막강했는지를 알 수 있다.
바울은 이런 상황에서도 복음 진리를 전혀 타협할 줄 몰랐다. 바울이 그 전통에 깊이 몸담고 있었기 때문에, 복음이 그것과 얼마나 상반되고 다른 것인지를 뼈저리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확실히 복음과 분리시킬 수 있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두 단락은 바울의 사도적 권위와 그의 복음의 정통성을 입증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바울은 이제 그가 전한 복음의 핵심을 정리해 준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다.
<16절> 본문과 관련된 4가지 논점 중,‘의’ 관련 어휘들의 의미는, 지슬러가 도움이 된다. 그는 동사의 경우는 법정적, 관계가 강하고, 명사, 형용사의 경우는 윤리적, 행동적 의미가 강함을 지적한다. 바울은 이들 두 의미 영역을 구분해서 활용하지 않고 연결해서 사용함을 지적한다.
16절의 부정 과거 동사: 단회적 반응이 가져오는 지위 변화 부각한다. 하지만, 동사와 부정 과거형, 현재형, 미래형이 다 나타난다. 이것은 지위의 변화에 기초한 삶의 방식의 변화의 의미도 함의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종종 율법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율법의 긍정적 가치를 인정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자주 율법의 문제점과 한계들을 지적한다. 기능에 있어서의 한계. 시대가 지났기 때문에, 예언의 시대에서 성취의 시대로 전환되었기 때문에, 율법을 철저한 한계가 있다. 율법은 그리스도를 내다보는 기능을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율법을 성취하신 이후, 율법은 철저하게 그리스도께 그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은 율법이 아니라 철저하게 그리스도께로 집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모든 관심은 그리스도 한 분께 모아지게 되었다. 율법의 행위들이 무엇을 의미하고 지칭하는가에 대해서는 특히 새 관점 주장자들과 관련해서 많은 의견들이 주장되어 왔다.
갈라디아서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유대교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이지, 1세기 당시 유대교 문제가 아니다. 그들의 문제가 무엇이었나를 이해하는 것이 갈라디아서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정했다. 그러나 거기에 더하여 율법, 그중에서도 할례, 음식법, 안식일, 절기 등을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역설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문제는 단순히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의롭게 되는데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리스도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뜻, 그 모자라는 것은 율법 준수, 행함으로 보총해야 한다는 생각은, 율법 공로 주의로 귀결되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의로워지는 데는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다는 주장이다. 바울은 이런 율법 공로 주의의 위험함을 통감하고, 율법의 행위를 그리스도의 믿음과 대조하는 수사적 전개를 사용한다. 본 절의 전반부는 ‘우리는 사람이 모세 율법을 준수하는 행위들(전반적 행위들)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을 안다.’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이미 받았다는 것이다.
<17절> 바울은 갈 교회가 직면한 문제를 두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바울이 선포한 그리스도의 복음은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성취한 복음이고, 따라서 윤리적 기준이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절대적으로 높아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바울이 말한 율법의 성취의 의미는 윤리의 기준을 절대적으로 높이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 행위가 의로워지는데 기준은 아니지만 마땅히 따라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죄를 율법의 준수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 기준으로서 성령의 능력을 부여하시는 분이시다.
<18절> 율법은 결코 칭의의 기초가 될 수 없고,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규범도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이 더는 그러한 기능을 하지 않음을 명백하게 선언한다. 율법은 그 목표하는 바가 그리스 돌였으므로, 그리스도가 오시면, 그 율법은 중단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내다보는 그리스도께만 집중하는 것이 사실은 율법을 가장 잘 지키는 것이었다.
<19절> 문자적으로는 내가 율법을 통하여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 율법을 통해서 율법에 대해 죽었다. 바울은 율법을 스스로 지킬 수 없음을 깨닫고, 율법에 대해 죽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죽음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사는 결과를 가져온다.
<20절> 바울은 율법에 대한 자신의 죽음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연결시켜 본질적 문제로 다룬다. 율법에 대한 죽음은 율법에 대한 자유를 의미한다. 이 죽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가능해졌다. 그런데 이 죽음이 영향을 미치려면 그리스도인 스스로도 그 죽음에 동참해야 한다. 이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 사이의 영적 일체감을 뜻한다.
바울은 이 일체적 죽음을 믿음으로 간주하고 있다. 바울은 육체와 행위 대조되고 있다. 바울의 삶은 율법을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안에서 사는 삶이다. 이것은 율법의 한계를 뛰어넘는 삶인 것이다. 이러한 삶은 바울 스스로의 노력으로 달성할 수 있는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믿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21절> 바울은 자신의 의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분명하게 선언한다. 율법과 그리스도의 공로가 공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중요시하면서도 율법 준수를 여전히 요구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된 것으로 만들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다.
이 고귀한 진리에 어떤 다른 요소라도 덧붙이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욕보이고 부정하는 것임이 바울의 최종 결론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