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 5장 그리스도인의 자유 (1)
5:1-6:10 그리스도인의 자유
5:1-12 믿음의 자유와 할례의 굴레
5:13-26 성령과 육체
6:1-10 선을 행하라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의 중요성을 부각하고,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지를 밝힌다.
5:1-12절은 믿음의 자유, 그리고 할례의 굴레, 믿음과 할례를 대조하고 자유와 굴레의 개념이 대조를 이룬다. 5:13-26은 성령과 육체의 대조가 전개된다. 육체에 속한 것은 무엇이고 성령에 속한 것은 무엇이냐 6:1-10은 선을 행하라는 삶의 권면이 주어지고 있다.
5:1-6:10까지는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의 중요성을 집중적으로 부각한다. 자유가 핵심 논제이고, 그 자유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지 밝혀 나간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의 삶은 온갖 규례들과 규칙들의 울타리에 갇혀 있는 얽매인 삶이었다. 하지만 그리스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힘입어 해방되었고,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진정한 자유를 누린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해방적 결과를 가져온다.
그 결과를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그런데도 갈 교회들 안에는 이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두 가지 위험한 경향이 있었다.
갈라디아 교회들 안에 있던 두 가지 위험한 경향
1) 율법 준수주의 내지는 율법 공로주의(밖에서 들어온) 5:1-12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바울의 복음을 대적하는 유대주의자들은 갈 성도들에게 복음에 더하여 구약의 율법 조항들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위험은 갈 교회 밖에서부터 들어온 위험이었다.
2) 윤리 경시론 내지는 방종(안에서 생겨난) 5:13-26
그에 반해, 윤리 경시론은 방종의 결과로 드러나는데, 갈라디아 성도들 가운데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를 오해해서 성령이 아니라, 육체를 따라 살아가는 방종의 결과를 가져왔다. 자기 맘대로는 육체를 따라 사는 것으로 바울은 규정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자유는 아닐 것이다.
이런 위험은 갈라디아 교회 안에서 생긴 위험이었다. 바울이 전했던 자유의 복음을 잘못 이해해서 그들 가운데 생겨난 위험이다. 그래서 율법 준수주의와 율법 공로주의는 밖에서 들어오는, 율법 경시론은, 방종은 안에서 생겨난 위험이다. 바울은 5:1-6:10에서 이 두 가지의 위험을 적시해간다. 5:1-12에서는 율법 준수주의의 위험에 대해서 5:13-26에서는 윤리 경시론에 대해 특히 방종에 대해 지적하며 권면해 간다.
믿음의 자유와 할례의 굴레(5:1-12)
율법 준수주의의 위험을 경계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바울은 1-4장을 통해서 경계되어 왔던 자신의 논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간다. 본 단락은 밖에서 들어온 위험, 곧 율법 준수주의적 위험을 경계한다. 본 단락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1) 1-6절: 믿음과 율법의 행위들(특히 할례) 대조
2) 7-12절: 십자가와 할례 대조
1-6절: 믿음과 율법의 행위들(특히 할례) 대조
1절-6절의 논점들은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다. 1절 상반절은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를 선언한다. 약속의 자녀가 누리는 특권은 자유이다. 1하~4절은 율법 준수적 교훈을 받아들이는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바울은 그 교훈 가운데서 할례와 관련된 그들의 주장을 경고한다. 할례는 받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바울의 주장이다. 할례를 받으면 율법 전체를 지켜야 하는데, 앞서 바울이 밝혔듯이, 율법을 다 지키는 것이 인간에게는 불가능하고, 따라서 다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떨어지는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5-6절에서 바울은 복음의 핵심, 믿음과 율법의 행위 사이의 대조적 결과를 설명한다. 갈 성도들은 믿음의 원리만을 붙들어야 함을 확인해준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그 어느 거나 가치가 없다. 유대주의자들은 할례를 강조하지만, 단지 사랑으로 표현되는 믿음만이 가치가 있다. 6절이 중요한 사상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 사랑이 믿음과 연관되어 나타난다. 사랑으로 믿음이 표현된다고 이야기한다. 바울은 이 시점에서 믿음이 사랑을 통해서 그 능력을 발휘한다고 이야기한다. 믿음과 삶의 필연적 관계를 설명한다.
사람들은 생각할 때, 특히 유대주의자들이 생각할 때 사랑은 율법의 영역으로 주장했을 것이다. 율법의 대명제가 사랑의 계명이기 때문에. 율법을 통해서 사랑을 행할 수 있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그 이면에는 갈 성도들이 사랑을 잃어버렸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니까 사랑을 회복하라고 주장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은 율법만의 영역이 아니다. 율법의 한계를 지적하고 율법으로부터 자유롭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 그것이 사람의 행위를 불필요하다거나 중요하지 않다 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복음은 율법의 기준을 훨씬 더 뛰어넘는 기준을 제시한다. 믿음을 가진 자들은 율법의 굴레에 얽매어 있는 자들보다 더 뛰어난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하다. 제자는 원수까지 사랑해야 한다. 기준 자체가 다르다.
7-12절: 십자가와 할례 대조
바울은 갈 성도들이 율법 준수적인 경향으로 빠져 들어가는 현 상황의 위험성을 직시하고 있고, 벗어나기를 촉구한다. 갈 성도들이 믿음의 경주를 잘 해왔음을 먼저 인정해준다. 하지만 외부의 침입자들이 그들의 경주를 방해하였고 그들이 요동시켰다.
그런데 그들의 가르침은 8절에서 너희를 부르신 분, 곧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 출처가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가르침은 누룩과 같아서 갈 교회 전체에 퍼져나가고 있는 상황임을 바울은 지적하고 있다. 기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아닌 것이 전체 퍼지는 위험성.
그렇지만 바울은 갈 성도들이 믿음에 굳건히 서게 될 것이라는 자신의 확신을 표현하다(10 상반 절). 그러면서 그들을 격려하고 있다. 사실 바울의 마음속에 책망의 마음만 있지 그들을 격려하고픈 마음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바울은 그들을 향한 미래의 신뢰를 보여준다.
아무리 문제가 많은 공동체라도 이런 격려가 필요한 것 같다. 소망의 끈은 놓지 말아야 한다. 성도들이 아무리 가망성이 없어 보여도 그들을 향한 성령 안에서의 신뢰, 미래를 향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것.
그러면서 바울은 거짓 가르침을 펼치는 자들은 마침내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밝힌다. 어쩌면 바울을 반대하는 어떤 이들은 바울이 ‘아직까지도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고 있다고 주장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갈라디아에 가서는 왜 할례를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그 이유는 갈 사람들에게 호의를 누리려고, 인기를 누리려고 바울을 비난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바울은 유대인이 할롈 받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예_디모데)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은 할례를 받을 수 있다, 받는 것 괜찮다. 그러나 이방인이 할례 받는 것은 금한다. 대상에 따라, 할례를 받도록 하기도 하고, 금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처럼 일관성없어 보이는 바울의 할례관 이면에 6절의 대원칙이 자리 잡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할례나 무할례나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 아니다. cf. 고전 7:19-20
그런데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받도록 주장하는 것은 할례를 지나치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의 선교 입장을 생각해보면, 고전 9:20-21, 유대인같이,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율법 없는 자같이.... 항상 대상dl 있었고 상황을 존중했다.
물론 바울은 그리스도께 개종하기 전까지는 할례를 열렬히 전했지만, 부르심 이후로는 할례를 전하지 않았다는 것은 대적자들로부터 박해를 받았음을 11절이 입증해준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고난을 십자가로 인한 고난임을 11절 하반절에 규정한다. 여기서 십자가의 걸림돌이란 표현은 유대인들이 십자가를 볼 때의 이해관이다. 할례를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은 십자가 때문이라는 연결 관계가 여기서 드러난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할례 대신 십자가를 전하는 바울을 박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바울이 할례를 전했다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을 것이고, 유대인 적대자들부터 박해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박해를 받고 있다는 것은 바울의 할례관을 확고히 반증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