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갈라디아서5장 그리스도인의 자유(2)

독거할매 2021. 4. 4. 19:09

갈라디아서 5장

자유와 방종, 성령과 육체(5:13-18)

앞 단락에서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의 중요성을 바울은 강조했고,

 

2021.04.04 - [말씀] - 갈라디아서 5장 그리스도인의 자유 (1)

 

갈라디아서 5장 그리스도인의 자유 (1)

5:1-6:10 그리스도인의 자유 5:1-12 믿음의 자유와 할례의 굴레 5:13-26 성령과 육체 6:1-10 선을 행하라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의 중요성을 부각하고,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어떤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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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 자유가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설명한다. 앞서서 2:5에서 갈 성도들이 복음의 진리를 위협받고 있는 상황을 언급했다. 바울의 대적들은 복음의 진리에 더하여서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마도 그들은 복음이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위해 필요하다면, 율법은 윤리적 행위의 기준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것 같다.

 

복음은 언약관계, 칭의에 도움이 되고, 율법은 윤리적 행위의 기준으로써 둘이 함께 필요하다고. 어쩌면 그들의 이러한 주장을 폈던 이유가 무엇일까, 왜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이 여전히 필요하다고 주장했을까? 그 이유 중 하나는 갈 성도들 중에서 복음이 주는 자유를 잘못 이해하고 윤리적 방종에 빠진 자들이 있었던 것이 아닐까? 윤리적 삶이 엉망임으로.
예) 루터를 추종하는 후원자들 사이에 믿음으로만- 그러면 행위는 대충이어도 되는구나.. 윤리적 방종의 문제에 깊이 들어갔던 예가 있었음.

 

갈라디아 교회 안에도 그런 오해들이 생겼던 것 같다. 자유를 잘못 이해해서 방종해 빠지는. 그러니까 밖으로부터 들어온 사람들이 보았을 때 이건 문제다, 율법을 폐기해 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율법도 지켜야 한다..... 이런 주장을 펼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러는 사이에 갈라디아 교회 안에는 율법준수주의자들과 자유를 빙자한 방종을 누리는 자들 사이에 서로의 입장이 옳다는 논쟁들이 있었고 서로 싸웠던 것 같고, 형제간의 사랑 실종되고 그것이 바로 갈 교회 성도들이 직면한 현실적 문제였던 것 같다.

 

사실 바울은 율법 준수주의자들의 심판을 경고했다. 여기서는 자유를 방종으로 오해해서 율법 준수주의자들과 물고 뜯는 싸움을 하는 갈 성도들에게도 경고한다. 바울은 이러한 상황을 육체에게 기회를 주는 것으로 말한다. 두 가지 점이다. 자유를 방종으로 오인하는 것, 그래서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유는 서로를 집어삼키는 모습으로 나타나서는 안 되고, 13절에서 밝히듯이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는 모습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바울은 이제 자유가 어떻게 주어지는가? 그 원리를 설명한다. 그것은 성령의 임재와 활동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참된 자유는 성령 안에서 발견되고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은 율법과 방종의 중간지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둘을 뛰어넘는 삶을 제시하고 가능하게 해 준다. 성령은 인간이 율법의 규범들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보조 수단은 아니다. 성령은 율법의 규범이 아니라, 그 율법의 규범들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절대적 기준을 제시한다.

 

더 뛰어넘는 의- 자유 

바울은 성령께서 이러한 절대적 기준을 제시해 주시고, 지킬 수 있도록 해 주신다고 한다.
더 나은 의는 복음서에는 하나님의 통치하심으로 선물로 주어짐을, 바울은 이 자유를 어떻게 누릴 수 있는가? 성령을 통해서 누림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율법관과 바울의 율법관이, 자유에 대한 이해가 다른 것이 아니고, 동일한 체제를 가지고 있다. 물론 표현과 작용 원리는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기본적 원리는 같다.

 

따라서 성령에 이끌리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굴레 아래에 있지 않다. 바울은 이것을 참 자유라고 한다. 성령 안에서 누리는 참된 자유와 율법의 기준조차도 지키지 못하고 율법의 욕심을 따라 사는 방종과 구분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율법의 자유를 율법으로부터의 방종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방종은 율법의 기준조차도 폐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인의 참 자유는 율법의 기준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절대적 기준을 성령의 능력과 임재로, 하나님의 통치로 주어지는 선물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선을 행함으로의 자유가 아니다, 선을 행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최고의 선, 곧 사랑의 삶을 이루어가는 자유이다.

 

 

왜 그것이 자유일까? 그 최고의 기준을 행하는 것이 스스로의 노력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베푸시는 자유로운 선물이기 때문이다. 선물로 사랑을 행한다. 성령님에 이끄는 삶은 율법 준수주의, 윤리 경시론도 아니다. 바울이 앞서서 강조했듯이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을 새로운 영적 존재로 이끄시는 분이시다. 동시에 하나님의 뜻에 민감하게 하시고 그 덕목들을 깨닫게 하시고, 살아가게 해 주신다. 하나님의 뜻에 민감해지면 자연히 그 뜻을 깨닫게 해 주시는데, 율법의 기준을 뛰어넘는, 따라 순종하게 하는 은혜를 베푸신다.

 

그러기에 사람을 지극히 낮은 수준의 규범으로 얽매는 율법은 이제 필요 없게 된다. 그 자체가 우리에게 기준이 되지 못한다. 바울의 사상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규범들에 얽매어서 최소한의 선한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이 아니다. 그보다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절대적 선을 이루며 넉넉하게 살아가는 자들이다.

 

종은 바동바동 하지만 아들은 여유 있게 누린다. 성령 안에서, 성령의 뜻을 따라 누리는 것이 참된 자유이다. 그리스도인의 선한 삶은 결과적으로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철저하게 성령의 은혜요, 선물이다. 그 어떤 공로도 있을 수 없다. 예수님 안에서는 하나님의 통치의 개념으로, 바울에게는 성령의 개념으로 드러난다.

 

육체의 행위들과 성령의 열매(5:19-26)

1) 육체의 행위들(악덕) 목록(19-21절)
2) 성령의 열매 (덕) 목록(22-23절)
3) 권면(24-26절)

 

바울은 육체의 행위들로 규정된 악덕 목록과 성령의 열매로 규정된 덕목 목록을 길게 나열하고 있다. 악덕과 덕의 목록은 바울의 특징적 유산은 아니고 고대 헬라 세계에서 널리 퍼진 윤리적 목록이다. 이 목록들은 앞 단락에서 언급된 성령 육체 대조를 확장 설명하는 기능을 한다. 이 두 가지 목록은 어느 것도 악덕이나, 덕을 전면적으로 나열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예를 제시하고 있다.

 

육체의 행위들 목록(5:19-21)

 

‘또한 이와 같다’(kai. ta. o [moia tou, toij)
이 목록이 모든 목록을 다 나열하고 있지 않음을 도입에서 밝혀주고 있다. 원문을 보면 단수와 복수가 혼용되어 사용되고 있다. 왜 그런가? 학자들의 제안. 단수는 단순한 자질 그 자체, 복수는 그 자질이 어떻게 표현되는가, 그 결과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악덕 목록 15가지를 분류한 다양한 시도들 가운데, 몇몇 학자들이 제시 중에, 15가지 악덕 요소들을 네 부류로 분류해보려는 시도들(Lightfoot, Fung)이 있다.

 

① 감각적 죄 세 가지: 음행, 더러움, 호색
② 이교와 관련된 죄 두 가지: 우상숭배, 주술
③ 분쟁과 관련된 죄 여덟 가지: 적대감들, 분쟁, 질투, 분노들, 대립들, 당 짓기들, 분열들, 시기들
④ 술 취함과 관련된 죄 두 가지: 술 취함들, 방탕들

하지만 Betz는 악덕 목록에 아무런 질서나 체계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악덕 목록의 혼란스러운 배열이 바울의 의도성임, 무질서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맨 앞에 나타난 첫째 요소 음행은 강조된 듯하다. 음행을 멀리하고 성적으로 정결한 삶을 사는 것은 당시에 성령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지목될 만한, 음행과 상관없이 사는 것은 두드러진 특징임으로, 그런 특징을 가져야 한다.

 

바울은 이런 악덕 목록을 통해서 육체에 기회를 주고, 육체의 욕심을 채우는, 자유라고 하는 방종이 얼마나 극심한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지 부각하려 한 듯하다. 바울은 율법 준수주의자들에 대해 강력한 심판 강조, 윤리 경시론자들에게 대해서는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복음 표현). 결국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율법 준수주의자들의 결과도 심판, 윤리 경시론자들의 결과도 구원으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윤리를 부차적 문제로 다루지 않는다. 예수님 사상과 너무나 일치한다. 주여 주여 하는 자들 아니라, 하나님 뜻을 지키는 자라야....더 뛰어넘는 의가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조건까지 되고 있다 .방종은 덜 위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율법 준수주의자들이나 다르지 않는 심각한 문제이다.

 

성령의 열매 목록(5:22-23)

 

덕 목록의 3중 구조(Betz)

① 첫째 세 요소(사랑, 기쁨, 평화): 하나님, 그리스도, 성령님께 돌려지는 속성들② 둘째 세 요소(인내, 자비, 선함): 인간에게 기대되는 행동.③ 셋째 세 요소(신실, 온유, 절제): 헬라 윤리에서도 대표적으로 칭송되는 보편적 덕목들.

목록 맨 마지막의 ‘절제’ 역시 그 위치상 중요성이 부각된다. 바울은 이 목록을 통해서 성령을 따르는 삶이 어떤 긍정적 결과를 가져오는지 확인해 준다. ‘육체의 행위들’ 표현과는 상이하게 ‘성령의 열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왜 그랬을까? 육체의 행위들은 인간에 뿌리를 둔다고 한다면 성령의 열매는 성령께 뿌리를 둔다고 볼 수 있다.

성령의 열매는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성령으로 이끌리는 삶의 열매를 자연스럽게 맺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은 자들은 마땅히 그 열매를 맺는 것이 기대된다. 바울은 일반적 윤리 덕목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외가 아니다, 당연히 갖추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윤리 안에 상식적 요소 빠져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목록 맨 앞의 ‘사랑’은 목록 전체를 대표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앞서 바울은 사랑을 강조했다. 믿음이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이 목록에서도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은 6절에서 사랑을 통해 역사하는 믿음, 사랑을 통해 서로 섬기라 명령했다. 14절에서는 사랑의 계명 안에서... 사랑의 중요성 계속 강조해 왔다. 따라서 이 목록에서도 사랑의 중요성을 부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아마도 바울이 사랑을 목록 전체를 대표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강조한 듯하다.

 

권면(5:24-26절)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그리스도인들은 ‘육체를 그 열망과 탐심과 더불어 십자가에 못 박다.’
십자가에 못 박은 내용이 무엇인가? 육체를 못 받았다. 이 육체는 앞서 육체의 행위들, 성령의 대조되는 대상으로서의 육체이다. 육체와 더불어 그 열망과 탐심을 함께 못 박아버렸다. 그 결과 그들은 이미 성령을 받았다. 3:2-5.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다 cf)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2:16.

 

그렇다면, 성령을 받았다면, 성령 안에서 행해야 한다. 성령을 받음과 성령 안에서 행하는 것은 필연적 관계라는 것이다. 성령은 칭의에도 연결되지만 우리의 삶에도 직결되는 관계를 갖는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성령 안에서 그분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또 이루어진다고 선언하다. 그러므로 갈라디아 교회 안에 이루어지는 다양한 문제들을 제거되어야 했다.

 

바울은 구체적 예로서 헛된 영광 추구, 화나게 하는 것, 질투를 제거해 나가라고 촉구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윤리에 관하여 ‘이미’와 ‘아직’의 긴장관계를 전제한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육체를 죽인 자들이다. 그리고 성령을 받았다. 그러기에 성령의 열매를 맺었고, 맺어가는 자들이다. 우리의 삶의 과정에서 맺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육체의 행위들이 남아있다.

 

따라서 아직 남아있는 육체의 행위들을 성령의 능력으로 꾸준히 제거해 가고, 그 결과로 더 풍성한 성령의 열매들을 맺어가야 한다. 성장의 과정으로 우리는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볼 수 있었다. 이는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의 성취와 언성 사이의 원리 적용되었듯이 우리의 삶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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