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20:1-21(십계명과 모세의 중재)
십계명(출 20:1-17)
20:1-2(도입)
1절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히. 데바림)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율법이라고 말하지 않고, 말씀이라고 되어있다. 십계명은 히브리 원문에 의하면 계명이 아니라, 열 마디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어있다. 아버지가 자녀에게 타이르는 훈계라고 할까, 율법이라고 하면 딱딱한데, 십계명은 그런 딱딱한 의미라기보다는, 아버지가 자식에게 주는 교훈, 타이름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
2절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십계명을 지켜야 하는 신학적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구원에 대한 반응으로 지키는 것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 언약적인 표현.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는 크게 세 가지로 표현된다. 아버지와 아들, 왕과 신하, 남편과 아내. 신명기는 특별히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로 표현. 친밀함.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친밀하게 여겨야 된다는 것이다.
① 1계명: 다른 신 숭배 금지(3절)
‘나 외에’ 히. 알 파나이 ⇨ 내 앞에
학자들 견해에 의하면 다른 신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단일신론적 사상인데, 다신론적 사상도 있고, 단일신론적 사상, 유일론적 사상 있다. 유일신보다는 단일신론적 사상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 이스라엘은 안 된다.
② 2계명: 우상 금지(4-5절)
우상 숭배는 항상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을 이렇게 섬기는 것은 우상 숭배하는 것이다. 내 개인적 목적,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섬긴다면 그 자체가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형상화 함
여기서 우상은 이방 신뿐만 아니라, 야웨도 포함한다.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은 하나님을 우상의 틀 안에 가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우상을 만든다. 내 욕심, 욕망을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신을 도구로 삼는 것은 우상이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이렇게 섬기는 사람 있다.
어떤 동기로 교회 안에 와 있는가?
기독교 신앙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절대적 위치에 두라는 것이다. 도구화, 상대적일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 조종되는 분이 아니시고, 인간이 만든 틀에 가두어지시는 분이 아니시다. 때로 신학자들이 교리를 만들어두고 하나님을 가둔다. 하나님은 꼭 이 교리 안에서 움직이셔야 합니다. 하나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되십니다. 하나님, 교리를 지켜주셔야 합니다. 하나님도 교리 지켜주셔야 하나님이십니다.
5b절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 배타적인 사랑의 관계.
연인 사이의 감정.
그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유익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이, 하나님 말고 다른 신, 특별히 바알신을 계속 섬기려고 했다. 잘 되었나?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이 우리의 행복이다. 왜냐하면, 창세기 보면 우리가 그렇게 지어졌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의존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태생적으로 하나님을 떠나서는 우리는 우리 삶의 존재를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삶의 의미, 내 자아도 잃어버린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만 내 존재, 삶의 의미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왜 살아야 되는지 그 의미를, 내가 누구인지를 비로소 찾는다. 나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은 나를 만드신 분이시다. 그분 앞에 가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③ 3 계명: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7절)
이름은 구약 시대에 존재 자체를 의미한다. 고대 근동에서는 신의 이름을 부르면, 신의 능력과 축복을 꺼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없다는 것.
안식일 계명(8-11절)
20:8(거룩한 날)
안식일 준수는 종교적 동기가 우선이다. 하나님께 속한 날이기 때문에 구별해서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피조물의 본분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자연 만물도 찬양하는데, 인간이 찬양하지 않는다면 잘못돼도 많이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매우 위험한 존재로 만든 것이다. 자유 의지를 주었기 때문에. 그렇지만 하나님은 자발적으로 섬기길 원하시기 때문에 기다리신다. 올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데 쓰도록 인간을 놔두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 팔을 비틀어서 하나님 믿게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매우 신사적이신 것 같다.
20:9(안식일 준수의 조건) ⇨ 엿새 동안 힘써 일함.
6일 동안 삶의 현장에서 자신의 책무를 성실하게 다하는 것이다. 자신의 본분에 맡게 살아야 한다. 그것이 안식일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이다. 가정일은 내팽겨 놓고, 교회 일만 한다면 안식일 누릴 자격이 없는 것이다. 육일 동안은 성실하게 본분을 다하라는 것이다.
안식은 노동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사회학적으로 인간을 ‘호모 빠 데르’라고 부르는데, 노동의 존재라는 것이다. 노동을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가능하면 안 하려고 하는데, 예수님을 통해서 원래 노동의 신성함을 회복했다. 노동은 자아실현의 도구이다. 일하는 것이다. 삶의 의미를 거기서 찾는 것이다.
20:10(인도주의 정신)
쉴 때는 너만 쉬지 말라는 것이다. 남종, 여종, 가축.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안식이 없었던 위치에 있는 사람들. 그들에게 안식을 주어야 한다. 그들도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줘야 한다. 안식일은 하나님께 속한 날이지만 동시에 인간을 위한 날이다. 복되게 했다는 것은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는 날이지만, 동시에 인간을 위한 날이기 때문에 쉬라는 것이다. 쉬어야 또 육일 동안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안식의 개념이다. 우리 인간의 몸을 그렇게 만드신 것이다. 쉬지 않고 일하면 망가지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너무 잘 아시기 때문에, 하루 쉬라는 것이다.
유대교에서의 안식일 계명
예수님 당시에는 39가지 안식일 계명, 또 이것은 세부적 계명들이 있어서 수 백 가지 계명이 되어 버린다. 아이러니다. 수 백 가지 안식일 계명이 되어버린다. 짐이 되어버리는 아이러니. 자기들은 안식일 지키려고 다른 사람들 일하게 만드는 우를 범하기도 한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좀 그렇다. 안식일에 엘리베이터 버튼도 안 누른다. 그런데 그 버튼 눌러주는 사람이 이방인이다. 예수님은 구약의 율법의 참 의미를 성취하셨다. 원래 의미를 회복하셨다는 의미도 있다.
20:11(하나님의 창조와 안식일)
⇨ 안식일의 신학적인 근거: 하나님의 창조 사건. 비교. 신명기 5장(구속의 사건).
신명기 안식일 개념은 출애굽기와 다르다. 구원의 사건과 관련돼서 안식일을 지키도록 되어 있다. 그렇게 보면 구약의 안식일은 창조(출애굽기)와 구원(신명기)을 기념하는 날로 이해할 수 있겠다.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새 창조가 이루어져서, 새 이스라엘의 구속이 완성된 날이기 때문에, 창조와 구속의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직접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주일을 지키는 것이다. 안식일을 어떤 날로 지키느냐, 그것이 유대교와 기독교를 구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원래 기독교 신앙은 유대교 토양에서 만들어졌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별개로. 대표적으로 예배 날짜가 다르다. 모슬렘은 금요일, 유대인은 토요일, 기독교인들은 일요일.
⑤ 5 계명: 부모 공경(12절)
부모 공경은 대신, 대인 계명을 연결해 주는 계명이다.
부모 = 하나님의 대리자.
부모 공경은 그래서 앞과 뒤를 연결시켜 주는 고리 역할을 한다. 부모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나를 양육하고 내 필요를 공급해 주는 분이다. 그런 면에서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이시다. 하나님은 나를 창조하실 때 부모를 통해서 창조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 공경은 하나님 공경으로 통한다. 그런 의미에서 부모를 업신여기고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을 업신, 저주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네 생명이 길리라’
단순히 오래 산다는 것 이상이다. 이 땅에서 잘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경험한다. 이것은 안 믿는 사람에게 주시는 약속이다. 요일서 저자의 말을 인용해 보면, 눈에 보이는,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그러면 내 육신의 부모부터 잘 공경해라. 이것이 성경의 사상이다.
자본주의적 사고가 우리를 물질주의적 관점에서 생각하게 한다. 사람도 그런 관점에서 본다. 노동력의 가치, 그런 면에서 보면 노인들이 가치가 있는가? 비성경적이고 사회 건강을 헤치는 요인이다. 젊은 사람들은 연장자들을 공경해야 한다. 세상 살아가는 것은 책을 통해서만 배울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어떤 것은 경험해봐야만 아는 지식이 있는 것이 있다. 그런 것은 어른들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지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해봐야 아는 것이 있다.
⑥ 6 계명: 살인 금지(13절)
“살인하지(히. 라차) 말라”
히. 라차 -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행동.
모든 살인을 다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계명을 근거로 살인 제도나 군 복무 반대하는 것은 잘못.
살인 금지의 이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생명은 하나님의 주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침해로 보는 것이다. 살인 금지 계명은 인간 생명의 절대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보호되는 것은 생명 자체가 아나니라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생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야훼 전쟁이나 재판정의 사형은 문제 되지 안 는다. 하나님의 위임이기 때문이다.
구약 성경의 원리는, 생명은 생명으로
사형제 폐지를 옹호할 수 있는 근거는 성경적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실수로 애매한 사람을 죽일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더 합리적인 것 같다.
⑦ 7 계명: 간음 금지(14절)
구약의 율법은 성범죄를 강하게
어떤 범죄는 특별하게 하나님의 범죄를 초래하는 범죄가 있다. 그중 하나가 간음죄, 살인죄, 우상 숭배.
이스라엘의 율법과 고대 근동의 율법 비교
가정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잇다. 가정은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천국에서 느끼는 기쁨, 행복의 비슷한 기관이 가정이라는 것이다. 사랑, 믿음, 소망이 있는 장소가 가정이라는 것이다. 교회도 그렇다. 교회와 가정은 이 세상 살아가면서 천국의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허락하신 영역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깨어진 가정이 너무 많다. 가정의 소중함 일깨워주어야 한다.
⑧ 8 계명: 도둑질 금지(15절) ⇨ 재산권 침해 금지.
⑨ 9 계명: 거짓 증거 금지(16절) ⇨ 재판정의 공의.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은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
재판정의 공의는 공의로운 사회를 이루는데 필수적이다.
⑩ 10 계명: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 것(17절)
⇨ 남의 것에 대한 내적 탐욕. 행동으로 표현될 수 있는 마음속의 욕망.
마음속의 욕망은 행동으로 나타난다. 탐욕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방치하면 범죄행위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은 마음의 문제를 말씀하신다.
‘네 이웃의 아내’ - ‘네 이웃의 소유’ 비교. 신 5:21.
아내도 남편의 소유의 목록처럼 되어 있다. 신명기 5:21은 다르다. 아내와 소유를 구별 지어 놓았다. 신명기에서는 아내가 남편의 소유물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모세의 중재(출 20:18-21)
20:18-19(백성들의 두려워함과 중재 요청)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이스라엘의 두려움의 반응. 모세를 통해서 말씀해 주기를 요청하고 있다.
20:20-21(모세의 중재)
건강한 두려움은 하나님 경외로 나아가게 한다. 무익한 두려움, 유익한 두려움이 있다. 무익한 두려움은 환경 때문에 생긴다. 유익한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주는 두려움으로 하나님 경외와 믿음으로 나아가게 한다.
20b절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 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두려움(경외)
21절 “백성은 멀리 서 있고 모세는 하나님이 계신 흑암으로 가까이 가니라.”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의미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알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양면성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나 보이시지만 또 한편으로는 신비에 가려진 분이시다.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 주실 때에만 부분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지극히 일부분. 때로 하나님은 신비에 감춰진 분이심을 성경은 같이 말하고 있다.
십계명과 계약 법전
십계명-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징표, 기본 규정. 하나님과 이웃 사랑의 표현. 그 한가운데 부모 공경이 끼워져 있다. 한 단어로 요약하면 사랑이다. 야웨 종교의 상징인데, 핵심은 사랑이다. 기독교 신앙을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사랑. 거룩의 완성도 사랑이다.
계약 법전- 십계명의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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