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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갈라디아서 3:19-25 율법의 기능과 목적

by 독거할매 2021. 3. 12.

 율법의 기능과 목적(3:19-25)

<19절> 지금까지 율법의 한계와 부정적 기능을 부각해 온 바울은 율법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던진다. 바울은 이 질문에 대해 율법의 기원부터 밝혀 나간다. 그것은 범죄들 때문에 주어진 것인데, 약속이 주어진 자손이 오실 때까지이다. 그것은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개인에 의해 주어졌음을, 방법까지 이야기한다.

 

바울은 처음부터 부정적 요소가 있었음을 밝힌다. (인간의 범죄들 때문에 주어졌음). 그 기원이 이처럼 부정적이기 때문에, 그 기능도 부정적인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 바울의 전제이다. 그러면서 바울은 율법의 기능이 한정된 기간에 한함을 밝힌다. 우리에게는 당연해 보이지만, 실재적으로는 헷갈리지만. 1세기 당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문제가 굉장히 충격적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하게 설명한다. 율법의 기능은 한정된 기간에서만이 다. 그것은 약속이 주어진 자손, 곧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만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에는 율법이 그 기능을 그리스도께 내어드리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이것이 잘 안돼서 갈라디아 교인들이 혼동에 빠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셨는데도, 율법이 어느 정도 기능해야 한다는 가르침에 빠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율법의 한계를 여기서 명확히 한다.

 

<21절> 율법과 약속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이냐? 그렇다면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들에 대해 반대되는 것이냐는 질문을 던진다. 언뜻 보면 그래 보인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바울의 답변은 ‘결코 아니다’는 것이다. 반대적 관계를 전면 부인한다. 하나님의 약속들도 모세의 율법도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따라서 둘이 충동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그 이유를 ‘만일 율법이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으로 주어졌다면, 의가 과연 율법으로 말미암았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한다. 율법이 주어질 때부터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율법의 한계이자 문제라는 것이다. 이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율법 준수 주의와 공로주 의자들의 문제이자 바울의 적대자들의 문제이다. 따라서 의는 율법으로 말미암지 못하는 것이 처음부터 율법의 기능이었다.

 

이처럼 율법은 처음 주어진 약속과 구별되어 있었다. 원래부터 의도가 달랐던 것이다. 따라서 의와 관련된 둘의 약속과 율법의 기능상 차이는 처음부터 의도된 것이고, 그것이 둘 사이의 충돌을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다를 뿐이지 충돌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둘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22절> 율법을 포함한 구약성경의 기능은, 그것을 통해 의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모두가 죄 아래 갇혀 있는 죄인들임을 확인하는 기능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죄인임을 확인시켜주는 기능을 한다. 그 결과 성경은 (구약)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임을 확인해준다. 바울은 확고하게 율법의 기능, 그것은 내다보는 기능일 뿐이지 그 자체가 의를 만들어주는 기능은 아님을 밝히는 것이다.

 

<23-25절> 율법은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보여주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기능을 한다. 그것이 ‘가정교사와 같다’라고 바울은 율법의 기능을 설명한다. 여기서 가정교사라고 번역된 단어, ‘파이 다고스는’ 대개 교육받는 노예들로서 그 집에 완전히 속해 잇는 자들이었다.

 

그들의 기능은 귀족 집안의 자녀들을 어렸을 때 통제, 훈육, 돌봐주는 역할을 했었다. 그래서 여기서 통제하는 기능은 부정, 보호, 훈육은 긍정적 기능. 그렇다면 본문 안에서 가정교사는 문맥의 흐름 상, 그 의미는 소극적이지만 긍정적 기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아이가 자랄 때까지만 그 아이를 훈육, 훈계하는 제한된 기간 동안만 그 기능을 하는 가정교사를 율법에 비유한 것은, 한정된 기간 동안만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 기능을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런데 그 율법이 기능을 마치는 때는 그리스도가 오시는 때고 그 이후의 사람들은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그 관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리스도가 오기 전의 상황에 대해 바울은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바울이 여기서 바울이 가정교사 얘기를 하는 것은, 이제 가정교사의 역할도 끝났다는 것이고, 율법이 아니고, 그리스도께만 관심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가정교사가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기능을 한정된 기간에만 하는 것이고, 그 기능을 그리스도가 온 이후에는 그에게 이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을 따라 된 상속자(3:26-29)

이 단락은 율법의 기능을 대체한 믿음의 기능과 그 효력에 대해 다각적으로 기술해 나간다. 믿음은 무엇보다도 신자들을 그리스도안에서 그 분과 연합되는 효력을 가져온다. 바울은 이러한 연합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시발적 사건인 세례 사건에서 경험된다고 (27절)에서 말한다.

 

바울은 이처럼 믿음과 세례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전제하고 있다. 믿음과 세례 사이의 긴밀한 상관관계. 그리고 바울은 세례 사건과 더불어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를 옷 입은 자로 묘사한다. 옷 입는다는 바울 서신들 가운데서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된다. 때로는 내적 자질을 부여받는 것, 때로는 영적으로 무장하는 것,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불멸성을 덧입는 것으로... 그런데 특별히 옷 입는다는 단어가 사람을 목적어로 취할 경우, 그 사람의 성품, 도덕적 자질, 의도 등을 취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다시 말해, 그 사람처럼 되는 것. 그렇다면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성품과 도덕적 자질에 있어서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을 뜻한다. 이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결과이다. 결국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셰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인이 되면 그런 자들은 그리스도로 옷 입었기 때문에, 인종, 신분, 성별과 불문하고 동일한 특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옷 입었기 때문에 드러나는 것은 그리스도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인종, 신분, 성별을 불문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일체감, 하나 됨을 갖는다. 그러한 모든 자들은 결국 그리스도의 것이 된다. 그에 속하면 그리스도의 지위와 특권도 함께 누리게 된다. 그것은 곧 ‘아브라함의 씨’이고, ‘약속에 따른 상속자들’이 된다.

 

앞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브라함의 씨들이 아니라, 유일한 씨라고 16절에서 이야기했다. 그런데 갈라디아 신자들, 너희를 포함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써 그리스도의 유일한 씨의 특권을 함께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특권은 약속에 따른 상속자들의 지위를 제공한다. 앞서 바울은 신자들이 믿음을 통해 누리는 경험들을 통해 칭의와 성령받음을 언급했다.

 

이제 바울은 그 칭의와 성령 받은 경험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을 경험하고,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고, 집단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됨을 이야기한다. 결국 믿음은 세례를 가능하게 하고 칭의, 성령 받음,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 아브라함의 씨가 되는 특권을 동시에 가능하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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