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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설교] 갈라디아서 5:13-18

by 독거할매 2021. 3. 12.

참된 자유의 삶

 

 

서론

 

5장1절에서 6장 10절까지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의 중요성을 집중적으로 강조하고 있는데, 오늘 본문 5장 13절에서 18절까지는 특별히 그 자유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어떻게 작용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의 삶은 온갖 규례들과 규칙들의 울타리에 갇혀 있는 얽매인 삶이었습니다. 1절에서 바울이 표현했듯이 ‘종의 멍에’를 메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힘입어 해방되었고, 성령의 내주 하심으로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해방적 결과를 가져오는데, 그 결과를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그런데도 갈라디아 교회 안에는 이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두 가지 위험에 직면해 있습니다. 첫째는 율법 준수 주의 내지는 율법 공로 주의이고, 둘째는 윤리 경시론의 결과로 나온 방종입니다. 앞서 우리가 5장 1절에서부터 12절까지 이 첫 번째 위험성에 대해 살펴봤었고, 오늘 본문에서는 두 번째 위험성에 대해 바울이 지적하고 권면하는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론

참된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란 무엇일까요?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가 자유일까요? 그리스도께서 값을 주고 사셨고 성령이 부여해주시는 자유는 단순히 외적 속박에서 풀려난, 그 이상의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에게는 성령 하나님께서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능력을 주셨기 때문에 그의 자유는 “참으로 자유”(요 8:36)한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롬 8:21)이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소원하여 행할 수 있는 내면적 능력의 회복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갈라디아교회 성도들 가운데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를 오해해서 성령이 아니라, 육체를 따라 살아가는 방종의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자기 맘대로는 육체를 따라 사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자유는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자유를 구실로 삼는 새로운 속박일 뿐인데 바울이 전했던 자유의 복음을 잘못 이해해서 그들 가운데 생겨난 위험이었습니다. 앞서서 2장 5절에서 갈라디아 성도들이 복음의 진리를 위협받고 있는 상황을 언급했습니다. 바울의 대적들은 복음의 진리에 더하여서 율법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복음이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위해 필요하다면, 율법은 윤리적 행위의 기준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것 같습니다.

 

복음은 언약관계, 칭의에 도움이 되고, 율법은 윤리적 행위의 기준으로써 둘이 함께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이죠. 그들이 이러한 주장을 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이 여전히 필요하다고 주장했을까요? 그 이유 중 하나는 갈라디아 성도들 중에서 복음이 주는 자유를 잘못 이해하고 윤리적 방종에 빠진 자들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갈라디아 교회 안에 오해들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자유를 잘못 이해해서 방종해 빠지는. 그러니까 밖으로부터 들어온 사람들이 보았을 때, 율법을 폐기해 버렸기 때문에, 이런 문제들이 생겼음으로 율법도 지켜야 한다, 이런 주장을 펼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갈라디아 교회 안에는 율법 준수 주의자들과 자유를 빙자한 방종을 누리는 자들 사이에 서로의 입장이 옳다는 논쟁들이 있었고 그러다 보면, 아무래도 서로 다툼이 생겼을 것 같고, 형제간의 사랑이 실종되고 그것이 바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직면한 현실적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참 자유를 누리는 길

사실 바울은 앞서 율법 준수주의자들의 심판을 경고했습니다. 여기서는 자유를 방종으로 오해해서 율법 준수 주의자들과 물고 뜯는 싸움을 하는 갈라디아 성도들에게도 경고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상황을 육체에게 기회를 주는 것을, 두 가지 점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자유를 방종으로 오인하는 것, 그래서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이죠.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유는 서로를 집어삼키는 모습으로 나타나서는 안 되고, 13절에서 밝히듯이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는 모습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며 참된 자유, 사랑으로 표현되는 섬김의 모습은 어떻게 주어지는가? 바울은 그 원리를 설명합니다. 그것은 성령의 임재와 활동으로 주어지는 것임을 16절에서 18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참된 자유는 성령 안에서 발견되고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은 율법과 방종의 중간지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둘을 뛰어넘는 삶을 제시하고 가능하게 해 줍니다. 성령은 인간이 율법의 규범들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보조 수단은 아니라 그 율법의 규범들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절대적 기준을 제시합니다. 바울은 성령께서 이러한 절대적 기준을 제시해 주시고, 지킬 수 있도록 해 주신다고 합니다.

 

성령에 이끌리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굴레 아래에 있지 않다는 것이고, 바울은 이것을 참 자유라고 말합니다. 성령 안에서 누리는 참된 자유와 율법의 기준조차도 지키지 못하고 율법의 욕심을 따라 사는 방종과 구분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방종은 율법의 기준조차도 폐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인의 참 자유는 율법의 기준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절대적 기준을 성령의 능력과 임재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선을 행함으로의 자유가 아니고, 선을 행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도 아니며, 오히려 최고의 선, 곧 사랑의 삶을 이루어가는 자유입니다. 왜 그것이 자유일까요?
그 최고의 기준을 행하는 것이 스스로의 노력에 의거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베푸시는 자유로운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적용 및 결론

 

해마다 우리 교회에서 섬김이들을 뽑을 때마다 어려움을 겪습니다. 모두들 안 하겠다는 것입니다. 다들 바쁘고, 할 일이 많고, 피곤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우리는 성장하지 않는다고, 항상 똑같다고 불평입니다. 나의 자유와 권리를 침범하지 말아 달라고 하면서, 누군가의 섬김과 희생이 있어야 만 나오는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너무나 아이러니하지 않나요? 이것이 자유일까요? 이것이 우리 구주께서 가르쳐주신 새로운 삶의 길일까요? 그리스도는 사랑과 섬김의 자리에 계셨고, 그것은 자유의 길이며, 그 사랑과 섬김의 자리에 우리가 서 보지 않고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깊이 알아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참된 자유를 누리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힘으로는 어렵고 불가능해 보이지만, 바울이 앞서서 강조했듯이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을 새로운 영적 존재로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뜻에 민감하게 하시고 그 덕목들을 깨닫게 하시고, 살아가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뜻에 민감해지면 자연히 그 뜻을 깨닫게 해 주시는데, 성령을 따라 순종하게 하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규범들에 얽매어서 최소한의 선한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절대적 선을 이루며 넉넉하게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성령 안에서, 성령의 뜻을 따라 누리는 것이 참된 자유입니다. 여러분 안에 이런 참된 자유를 누리고, 성령 안에서 사랑의 풍성한 삶이 넘쳐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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